희망사진관
아직-아님으로서의 아님은 생성된 존재를 가로질러간다(에른스트 블로흐)
임동확
단지 그렇게 기억되고 있을 뿐
결국 방향이 없는, 그리하여 종말이 없는, 단 한 번도 인화되지 않은 것들이 추억일까
어느 정지된 순간에 대한 덧없는 집착이 희망의 정체였을까
서울 출장길 늦은 귀가의 택시 속에서 만난 신안동 고갯길
희망사진관의 입간판이 낯설다; 아니, 정확히 말해
희망이란 낱말이 왠지 낡고 생소한 느낌이다
그런데도 길거리로 향한 형광 불빛 속에 드러난 사진의 얼굴들은
어찌하여 모두들 오래 행복한 표정들을 짓고 있는 것일까
어찌하여 그 많은 잊고 싶은 것들 속에서도
저처럼 끄떡없이 변치 않은 열망들로 살아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제 죽도록 미워할 사람도
사랑할 사람마저도 없는 내게 지금 묻는다면,
내가 짓뭉기고 외면해온 시간의 흔적들밖에 더 말할 게 없다
심지어 죽음마저도 뚫고 들어가지 못한 마음속으로
여전히 아니라고 도리질치며 지나가는 매서운 북풍소리
가장 가까운 것들조차 따스하게 대하지 못했던 불구의 시간들을 고백하고 싶어진다
보라, 그러니 저 사진틀 속에 영원히 멈춰 있는 것들조차
이미 존재했던 것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건 오히려 미처 드러나지 못한 요청이었을 뿐
여전히 우릴 살아 불타게 하는 것들은
저 스러질 듯 서 있는 현실의 희망사진관 너머
아직 기억되거나 생각나지 않은 낯설음 속에
모든 희망들이 추문이 된 바로 이 세월의 그리움 속에
끝내 지워지지 않을 무모한 절정의 섬광들로 빛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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