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공부/상담사의 詩 읽기

다시 쓸쓸한 날에/강윤후

상담사 이우 2014. 1. 1. 22:26

다시 쓸쓸한 날에

 

 

강윤후

 

 

오전 열시의 햇살은 찬란하다. 무책임하게

행복을 쏟아내는 라디오의 수다에 나는

눈이 부셔 금세 어두워지고 하릴없이

화분에 물이나 준다. 웬 벌레가 이렇게 많을까.

살충제라도 뿌려야겠어요, 어머니.

그러나 세상의 모든 주부들은 오전 열시에 행복하므로

엽서로 전화로 그 행복을 라디오에 낱낱이 고해바치므로

등허리가 휜 어머니마저 귀를 뺏겨 즐거우시고

나는 버리지 않고 처박아둔 해진 구두를 꺼내

햇살 자글대는 뜨락에 쪼그리고 앉아 공연히

묵은 먼지나 턴다. 생각해보면 그대 잊는 일

담배 끊기보다 쉬울지 모르고

숙뜸 떠 毒氣를 삭이듯 언제든 작심하여

그대 기억 모조리 지울 수 있을 것 같은데 새삼

약칠까지 하여 정성스레 광 낸 구두를 신자

나는 괜히 기분이 좋아져 피노키오처럼 걸어본다.

탈수기에서 들어낸 빨랫감 하나하나

훌훌 털어 건조대에 널던 어머니

콧소리 흥얼대며 마당을 서성거리는 나를

일손 놓고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시고

슬며시 짜증이 난 나는 냉큼

구두를 벗어 쓰레기통에 내다버린다.

올곧게 세월을 견디는 그리움이 어디 있으랴.

쿵쾅거리며 마루를 지나

주방으로 가 커피 물을 끓이며 나는 이제

아무도 사랑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그러나 애야,

죽은 나무에는 벌레도 끼지 않는 법이란다.

어머니 젖은 걸레로 화분을 닦으시고

나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살아갈 날들을 내다본다. 그래, 정녕 옹졸하게

메마른 날들을 살아가리라. 바짝바짝

퉁명스레 말라가리라. 그리하여

아주 먼 어느 날 문득

그대 기억 도끼처럼

내 정수리를 내리찍으면

쪼개지리라

대쪽처럼 쪼개리지라.

 

[mome] 이 시는 시집의 제목이기도 하다. 내 방 책꽂이에는 몇 권의 시집이 꽂혀있다. 아주 오랜된 것이다. 내 기억으로는, 고등학교때나 아님 그 후 대학시절 몇 권씩 구입한 것이다. 시집이나 책을 사면 늘 표지 넘겨 여지에 구입날짜를 적는게 버릇인데, 이 시집에는 기록이 없다. 얼추 1995 년 펴낸 책이면, 그 때 구입한 것 같다. 종이는 누래졌다. 그리고 오래된 종이 냄새가 난다. 접혀진 페이지는 왜 접어놓았는지 이제 기억도 없다. 1995년. 그 시절은 혹독한 쓸쓸함에 마음도 몸도 지친 시절인 듯 하다. 집으로 가는 길에는 언제나 시장 만두가게에 들려 찐만두 한 접시에 소주 한 병을 마시고 들어갔다. 그리고 어둑한 골목길에서 나는 노래를 불렀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노래를, 스스로 되새김질 하며 잊지 않기 위해 불렀다. 내겐 그런 시절이었다. 사랑을 잃고 시를 쓰듯이 가슴 한켠에 쓸쓸함을 안고 살았다. 외롭다기 보다는 그저 쓸쓸할 뿐이었다. 어슬렁거리며 전봇대 가로등 아래 쪼끄리고 앉아 쓴 담배를 피웠다. 그리고 그리워했다. 빨리 독립하고 싶었다. 내겐 방이 필요했다. 쓸쓸함에 대해 생각하며 한 해를 마무리 하고 또 한 해를 맞이한다. 올 한 해는 더 애잔해질수 있도록, 자신의 감정을 더 진하게 느끼며 더 성숙해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