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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은 아름답다-내가 매일 하는 일들/김탁환

상담사 이우 2014. 1. 22. 21:18

반복은 아름답다 - 내가 매일 하는 일들

 

집필실에 도착하면 소설을 쓰기 전에 통과의례처럼 세 가지 일을 한다. 프랑스의 소설가 발자크처럼 평상복을 벗고 수도복으로 갈아입는 거창한 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이 방으로 들어서기 전까지의 자연인인 나를 지우고, 오직 내가 쓰고 있는 이것에만 집중하려는 또 다른 나를 깨우기 위함이다. 해군사관학교 교관에 선발되어 진해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연구실에서, 수면 위로 날아오르는 수백 마리의 날치 떼를 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내 안의 이야기를 띄워 올릴 때까지 생긴 습관이다.

 

먼저 창문을 연다.

 

창틀에 기대어 서서 주변 풍광을 쳐다본다. 때론 비가 내리고 때론 안개 자욱하고 때론 햇빛 따사롭다. 열린 창으로 바람이 들어와서 집필실을 휘돈다. 어둠에 깃들었던 책들이 놀라 흔들린다. 나는 가만히 어제 타올랐던 불꽃의 재들이 방에서 빠져나가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창문을 다시 꼭꼭 닫는다. 커튼까지 완전히 친다. 전등을 켜지 않고는 글을 읽지 못할 만큼 캄캄한 어둠이 다시 집필실을 감싼다. 뱀파이어의 피가 흐르기 때문일까. 아니면 문장이란 놈이 어둠과 가장 잘 어울리는 짝인 탓일까. 내 이야기는 어둠에서 어둠으로 길게 이어지고, 바깥의 풍광은 틈입할 자리가 없다.

 

그리고 첼로 연주곡을 튼다.

 

바이올린이나 피아노 혹은 오페라나 가요가 아닌 오직 첼로다. 가사가 있는 음악은 그 노랫말이 이야기에 섞여들기 때문에 금물이다. 날카로운 바이올린과 청명한 피아노는 신경을 자꾸 건드린다. 모름지기 소설은 특히 장편은 착 가라앉아서 둔중하게 나아가야 한다. 처첨한 풍광 앞에서도 비명 지르지 않고, 슬픈 이별을 당해도 눈물 쏟지 않은 채, 생(生)이란 원래 그런 희로애락을 지녔다면 다 감싸 안고 도도히 흘러가는 강처럼 쓰고 또 써야 하는 것이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첼리스트는 첼로의 음유시인 다닐 샤프란이다. 샤프란이 연주하는 바흐의 첼로 무반주 조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들으며, 『파리의 조선 궁녀, 리심』도 썼고, 『노서아 가비』나 『99-드라큘라 사진관으로의 초대』와 같은 최근작들도 마무리를 지었다. 선율을 따라 손을 놀리다보면, 샤프란과 내가 하나가 되어 이야기를 짓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첼로의 쿵쿵쿵 깔리는 음이 내 심장을 쳐서 깨운 적도 여러 번이다.

 

요즈음은 요요마가 다큐멘터리 『新 실크로드』를 위해 연주한 곡들을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 듣는 편이다. 2007년, 소설 『혜초』 답사를 위해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길을 다니면서 틈틈이 다큐멘터리를 함께 보았다. 타클라마칸 사막을 따라 달리는 기차간에서 들은 요요마의 첼로 선율을 잊을 수 없다. 굽이굽이 흰 길, 아득히 나는 새, 텁텁텁텁 메마른 강의 이야기들이 그 속에 모두 담겨 흘렸다. 어딘가로 떠나고 싶을 때, 그러나 지금 쓰고 있는 이 소설 때문에 멀리 가진 못할 때, 요요마의 이 곡이 없었다면 흔들리는 내 마음을 어떻게 달랬을까.

 

마지막으로 검은 피 커피를 한 잔 만든다.

 

집필 전에 커피를 마시는 일은 대학 시절 자판기 커피에서부터 비롯된 오랜 습관이다. 커피와 나눈 인연을 '내가 아닌 것들이 들어와서/나를 바꾸려 한다'는 짧은 시로 표현한 적도 있다. 커피를 내려 마시면서부터는, 첼로를 들으며 고이는 검은 물을 바라보는 시간을 더 아끼게 되었다. 그때 나는 이상하게도, 파리처럼 양손을 비비거나 호호 불기 시작한다. 엄지부터 새끼손가락까지 차례차례 접었다가 펴기도 하고 손목도 돌리고 어깨도 흔든다. 장편을 쓰는 일은 노동이다. 그것은 정신노동이며 또한 육체노동이다. 내 오감의 깨달음들이 뇌로 모아졌다가 다시 손끝으로 옮겨가는 일이다. 그 모든 과정이 자연스러워야 한다. 어디 한 부분이라도 불편하면, 가령 어깨가 걸리거나 손목이 아리거나 손톱이 갈라지면, 100퍼센트 문장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저 검은 피 커피가 다 내려오면, 곧바로 쉼없이 작업에 몰두해야 하기 때문에, 마지막 점검을 할 시간은 지금 뿐이다. 커피가 완전히 모이면, 머그컵에 가득 따라 들고 집필용 책상으로 간다. 충분히 어둡고 충분히 첼로 선율에 공기들이 젖어 있다. 자판기를 양손바닥으로 쓰윽 쓰다듬은 후에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혀와 식도와 위까지, 검은 석유가 들어간다. 그리고 쓰기 시작한다. 어제 잠시 멈춘 이야기에 뒤이어 인물들이 등장하고, 시간이 지나고 공간이 펼쳐진다.

 

…… 소설을 위해 집필실에서 이렇게 세 가지 일을 반복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니다! 내가 매일 하는 일이 한 가지 더 있다. 그것은 하루 집필을 마친 순간에 온다. 초고는 컴퓨터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자판으로 치지만, 퇴고는 반드시 프린트를 해서 붉은 펜으로 고친다. 예전에는 한 권을 다 쓰고 한꺼번에 퇴고에 돌입한 적도 있지만, 5년 전부터는 그날그날 쓴 원고를 프린트해서 고친 뒤 하루 일과를 마친다.

 

퇴고의 시간은 절망의 시간이다.

 

아침에 창문을 열고 닫고, 첼로를 듣고, 커피를 마시며, 오늘은 정말 멋진 문장들을 낚아 올리리라 희망에 차서 달려들지만, 프린트되어 나온 문장들은 최선은 물론 아니고 차선도 차차선도 아니고 차악을 거쳐 최악에 이른다. 아, 이건 아니다. 이건 아니다. 이건 아니다! 붉은 펜으로 죽죽 긋고 고치다 보면, 남아 있는 단어가 몇 개 없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부분을 따로 모아 날짜를 병기한 파일을 저장한 뒤 작업을 마친다.

 

터덜터덜 집필실을 나온 후엔 소설을 잊으려 한다.

첼로를 듣지 않고 커피도 내려 마시지 않고 창문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자면 절망의 충격을 지우고 '내일 어디 한 번 더!'와 같은 희망을 다시 채워 넣는 시간이다. '소설 그 까진 것 뭐' 호기도 부리고, '어젠 특히 재수 없는 날이었어' 단정도 짓는다. 그 절망과 고통을 모조리 기억한다면 벌써 소설가를 포기하고 딴 직업을 찾아 나섰을 것이다. 적당한 망각은 소설가에게 축복이다. 신비로울 정도로, 하룻밤만 무사히 보내고 아침에 눈을 뜨면, 집필실로 빨리 달려가고 싶어 마음이 급해진다. 오늘은 정말 끝내주는 문장이 나올 것만 같다고 졸곧 중얼거리면서, 집필실에 도착한다. 창문을 닫고, 첼로를 틀고, 커피를 내린다.

 

희망에서 절망으로 롤러코스터 하루가 다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