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_庚子年/독서일기_2020

(인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반야심경/야마나 테츠시 지음, 최성현 옮김

상담사 이우 2020. 8. 11. 22:26

근래에 천자문, 반야심경 등을 읽고 새기고 있다. 

 

불경중에서 가장 짧지만(262자)...그래서 이전에 불교재단 학교에 다니던 중학교 친구는 목사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반야심경을 외우고 다녔다. 반야심경에 대한 여러 해설서가 있지만, 옮긴이는 "일본에서 가장 많이 팔린 ≪반야심경≫ 해설서"라는 서점 앞 안내서를 보고 목차와 그 내용 일부를 읽어보곤 번역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만큼 쉽게 쓰여졌고 현대적인 언어로 낯설지 않게 설명하고 있다. 

 

≪반야심경 은 이렇게 말한다. 

한 수행자가 있었다. 

그는 반야바라밀다를 깊이 수련하는 가운데

세상의 모든 것이 공空함을 깊이 이해하며

일체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됐다. 

 

......한번 대충 읽어보다 마음에 꽂힌 글귀.....

 

스스로

그 행위를

멈출 수 없다면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눈길이 머문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을 조심스레 읽어보아야겠다.

 

삶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하다

시작 

(20) 불교는 '모르는' 상태에서 '아는', '깨달은' 상태로 옮겨가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그렇게 '앎'을 통해 나의 행동 방식, 곧 내 삶의 방식을 바꿔 가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22) 그러므로 '반야심경'이란 '지혜의 완성, 그 핵심을 설한 경전'이라는 뜻입니다. 

(25) 생로병사, 슬픔, 괴로움의 불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몸을 태우고 있다. 사람은 먼저 이렇게 우리에게 닥쳐 있는 문제들에서 벗어나기 위한 길을 닦지 않으면 안된다. 

(32) 불교 자체가 붓다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원형에 가까운 원시불교 경전을 빼고서는 불굘를 말할 수 없습니다. 소승에 관한 연구 없이는 불교 연구가 되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반야경 그룹은 대승과 소승을 잇는 다리와 같은 위치에 있는 경전입니다. 

자신의 행복은 타인의 행복과 별개가 아니다. 

행복 

(42) 이 세상의 모든 적의, 불만, 부정적인 감정, 곧 모든 불행한 상태는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 데서 일어납니다. 

(42) 거의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을 '그다지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 여기고 자신을 마음 밑바닥으로부터 사랑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43) 흔히 '나'라고 부르며 사랑하고 있는 것이 실은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많은 사람이 모르고 있습니다. 

(47)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가능성을 가진 한 사람의 인간으로 살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어떤 한 기업의 인간이 되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닙니다. 

(50)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사람이 무의식 속에서 변함없이 '행복해지기 위한 목표', 바꿔 말하면 '내게 만족감과 기쁨을 주리라 여겨지는 것'을 끝없이 쫓아가는 삶을 삽니다. 그 방식을 멈출 수 없습니다. 

(50) 붓다는 이런 상태를 '무명 無明, 무의식의 덩어리=무지=무자각'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그것이 '괴로움'의 진짜 뿌리라고 말합니다. 

스스로 그 행위를 멈출 수 없다면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괴로움

(54) 붓다의 가르침은 이론적으로는 여러 가지 어려운 면이 있지만, 실천적인 문제의식에서 보았을 때는 괴로움으로부터의 탈출 방법에 지나지 않습니다. 

(55) 괴로움에 대한 네 가지 이론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1.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알아차려 주십시오)
 → 나는 괴로움 속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단계
2. 이렇게 괴로움이 일어난다(라고 알아차려 주십시오)
 → 괴로움이 일어나는 얼개를 아는 단계
3. 이것은 괴로움이 없는 상태이다(라고 알아차려 주십시오)
 → 괴로움이 없는 상태가 어떤 것인지 알고, 
나도 거기에 이를 수 있다는 확신을 갖는 단계
4. 이것은 괴로움을 없애기 위한 방법이다(라고 알아차려 주십시오)
 → 훈련법을 실천하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임을 깊이 이해하고, 그것을 실천해 가는 단계
 
(56) 고苦라는 한자는 고통, 고뇌라는 주관적인 감정의 뉘앙스가 강합니다. 하지만 산스크리어 원문인 'Dukkha'는 차축과 차륜 사이의 틈에 탈이 생겨 잘 돌아가지 않는 상태를 일컫습니다. 요컨대 무엇인가 잘 안 되고 있는 상태, 불만족한 상태, 어긋나 있는 상태, 조화롭지 않은 상태, 안정이 안 돼 있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57) 따라서 이 '제 1단계의 알아차림'이야말로 행복으로 가는 커다란 한걸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59) 괴로움 속에 있다고 자각한 다음 단계는 괴로움이 왜 일어나는지, 그 이유를 알아채는 단계입니다. 

(59) 실제로는 여러 가지 일에 속박되어 그것들에 내몰리며 살고 있는데,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자유롭게 살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상태를 붓다는 무명이라고 말했습니다. 

(61) 바라기만을 할 수 있을 때, 곧 바라는 것을 멈출 수 없을 때는 '내가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닌 '욕망에 사로 잡혀 있는' 상태라는 겁니다. 이런 상태를 '탐욕', 곧 탐내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64) 욕망이 바라는 것을 얻고자 하는 욕심 때문에 자신을 멈출 수 없는 상태라면, 화는 자신에게 불쾌한 것을 배제하고자 하는 충동에 지배당해 스스로를 멈출 수 없는 상태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65) 우리는 '나이지만 내가 아닌 상태'에 빠져 조금도 자유롭게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65) 하지만 아무리 주관적으로 '내가 좋아서 하고 있다'라고 하더라도, 어떤 행위를 할 때 그 행위를 멈출 수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조금도 자유로운 행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완벽히 독립적인 존재란 없다

 

공 空

 

(70) 우리는 철두철미하게 조건 지어진 존재입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힘이 늘 작동합니다. 이런 상태를 불교에서는 '공空'일고 표현합니다......그것은 다른 것의 힘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자신의 힘만으로 움직이는 독립된 존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71) 어찌 됐든 핵심은 깊게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깊게 이해하면 반드시 삶의 방식이 바뀝니다. 그것이 '공'이자 '공의 힘'입니다. 

 

(73) 집착을 버리라고 하지만 어떻게 버리면 좋을지 알 수 없습니다. 그 점에 관한 언급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간단히 버릴 수 있는 것이라면, 이 세상의 모든 괴로움은 진작에 없어졌을 겁니다. 

 

(74) 붓다 스스로 자신을 철학자라고 규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의 관심은 오직 하나였습니다. 사람은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그것밖에 없었습니다. 그 밖의 것은 붓다에게 아무래도 좋았습니다. 

 

(75) 제가 '공'에 대해 생각하거나 말할 때 늘 염두에 두는 것은 괴로움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붓다의 자세입니다......불교에서 '공'이란 말이 현실감을 가지는 것은, 그것이 '괴로움'과 한 세트, 한 짝이기 때문입니다. 

 

(77) 반야의 지혜를 완성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이 공하다, 실체가 아니다.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체득할 수 있고, 그에 따라 괴로움을 없앨 수 있다는 겁니다. 

 

(78) 다시 말하지만 '괴로움'과 '공'과 '반야', 이 세가지가 키워드입니다. 이 세 가지를 알면 불교를 알았다고 해도 좋습니다. 다만 그 앎에는 깊고 낮음이 있어, 그것을 깊이 체득해가는 데 붓다조차 자신의 일생을 바쳤습니다. 

 

(79) 반야의 지혜란 간단히 말하면 '자신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자신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화가 날 때 '나는 지금 화가 나 있다'라고 알아차리고, 슬플 때 '나는 지금 슬퍼하고 있다'라고 알아채는 것입니다. 

 

(80) 매 순간 무엇을 느끼는지, 어떻게 느끼는지를 아는, 자각하는 지혜가 '반야의 지혜'입니다. 반야의 지혜가 왜 그렇게 중요한가 하면, 이 지혜만이 '나는 어떤 사람인가'하는 물음에 답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81) 우리가 어떤 감정을 느낄 때 우리는 그 가정과 하나가 돼 있습니다. 화가 날 때도 화와 하나가 돼 있기 때문에 '나는 화가 나 있다'라는 걸 알아챌 수 없는 것입니다. 알아차림, 혹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아는' 것은, 곧 자각은 그 대상과 하나가 돼 있을 때는 불가능합니다. 

 

(82) 자아란, 곧 나란 정신과 몸의 복합체입니다. 붓다는 이 점을 철저하게 인식했던 사람입니다......이것을 한 번 더 바꿔 말하면 몸과 정신은 서로가 서로를 조건 짓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정신과 몸의 상호 조건 짓기를 철저히 파헤침으로써 만들어졌습니다. 

(82) 내분비계의 변화나 근육의 수축 등을 동반하지 않은 감정은 없습니다. 감정이란 몸의 변화 자체라고 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둘은 나뉘어 있지 않습니다. 

(85) 머리로 뭔가를 판단하기 이전에 몸과 마음의 복합체로서의 자아가 거의 자동적으로 과거에 프로그래밍된 반응을 재현해 버리기 때문입니다......다만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을(=무의식=무자각=무명)'뿐입니다. 

(86) 그것은 바깥에 있는 것이나 바깥에서 일어난 일과 같이 '내가 아닌 것'과의 관계로부터 일어납니다. '내 감정'은 '내가 아닌 것'에 촉발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습니다. 

(88) 인간은 바깥으로부터 물질만 받아들이는 데 그치지 않고 '정보'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출력으로서 '행동'을 합니다. 

(89) 바깥에 있는 물질 현상 일체를 불교에서는 '색'이라고 부릅니다. '색'은 인간에게 문자 그대로 색깔과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에게 정보로서 기능합니다. 

(91) 과거에 있었던 일, 기억 또한 우리를 조건 짓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에도 우리는 조건 지어져 버립니다. 

(92) 늘 우리는 이미지라는 정보에 반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우리 몸과 마음은 정보에 조건 지어져 있지 물리적인 힘에 조건 지어져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93) 우리의 자아는 과거의 일이나, 미래의 일이나, 참이거나 참이 아니거나, 모든 것에 반응합니다. 요컨대 모든 것에 영향을 받고 철저히 속박돼 버립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살고 있지 않습니다. 

 

(94) 우리는 바깥에서 자신이 본(그렇게 여기는) 것에 순간순간 반응하면서(조건 지어져 있으며) 무자각하게 살고 있습니다. 본(그렇게 여기는) 것, 들은(그렇게 믿은) 것에 순간적으로 반응하며 삽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99) 우리는 '진짜로 실재하는 것'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색깔과 모양을 비롯한 정보에 반응하고 있을 뿐인데, 우리는 조금도 그 사실을 모릅니다. 알아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틀림없이 실재하고 있는 것에 반응하고 있다고 굳게 믿습니다. 실제로는 우리 신체에 나타나는 반응이 그 대상의 현실성을 만들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 말입니다.

 

(99) 바깥(색)과 안(자아)은 둥근 원처럼 둘이 하나가 돼서 원을 이루고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거울이 돼서 상대방을 비추고 있습니다. '색'과 '자아'는 둘 다 공합니다. 독립돼 있지 않습니다. 

 

(103) 우리의 감정을 만드는 것은 바깥에 있는 것이나 바깥에서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바깥 세계로부터의 정보에 반응하는 우리 자신의 자아, 곧 정신과 몸의 복합체입니다. 그것을 알아채게 만들어 주는 것이 '반야의 지혜'입니다. 

 

바깥 세계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

 

희망 

 

(108) '바깥을 향한 나의 반응'이 바뀐다는 것은 결국 '바깥 세계' 자체가 바뀐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나'와 '바깥'은 서로 의존해 있기 때문입니다. 나뉘어 있지 않고 하나로 이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113)괴로움이 일어나는 열두 단계

1. 무명 無明  무지, 어리석음

2. 행 行        뭔가를 만드는 잠재적인 힘

3. 식 識        인식

4. 명색 名色  정신과 물질

5. 육인 六入  감각의 여섯 가지 영역

6. 촉 觸        접촉

7. 수 受        감각

8. 애 愛        집착하는 마음

9. 취 取        집착하는 행위

10. 유 有      생성

11. 생 生      출생

12. 노사 老死 늙음과 죽음, 괴로움

 

무명이 있을 때 행이 있고, 행이 있을 때 식이 있고.....라는 식으로 읽어갑니다. 

 

(115) 바깥 세계의 정보에 대해 자동적으로 반응해 버리는 존재라는 것을 알아채는 활동입니다. '알아차림', 곧 '자각'을 통해서만 우리는 자동적인 반응을 멈출 수 있습니다. 

 

(116) 중요한 것은, 그것을 추상적인 진리로서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화가 나 있을 때나 욕심을 내고 있을 때처럼 스스로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 있을 때, 그 자리에서 그 사실을 알아채는 일입니다. 그런 능력이 곧 반야의 지혜입니다. 

 

(118) 바깥 세계의 정보에 '나'는 어떤 감정을 체험했는지, 그 감정에 따라 어떤 반응을 취했는지 등을 알아가는 길 말고는 '나는 누구인가'를 알 길이 없습니다. 

 

멈추어 냉정하게 바라볼 때 진정 자유로워질 수 있다. 

 

알아차림

 

(123) 다른 것과 바꿀 없는 가치가 나에게 있다는 것을 스스로 믿을 수 있고, 스스로 마음속으로부터 자신을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바깥 세계를 두려워하며 바깥의 반응에 일희일비하지 않아도 됩니다. 

 

(123) 앞에서 설명한 괴로움에 관한 네 가지 진리를 아는 것만으로는 진리가 몸에 붙지 않습니다. 몸에 붙지 않으면 삶이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삶을 바꾸기 위해서는, 괴로움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나날의 실천이 필요합니다.

 

삶을 바꾸는 여덟가지 바른 길(八正道)

정견 正見      바르게 보기

               괴로움에 대한 네 가지 진리를 완전히 이해하고, 인과의 법을 믿고, 모양이나 욕망에 혹하지 않는 것

정사 正思       바른 생각

               번뇌를 갖지 않겠다고 결의하는 것. 집착하지 않고, 화내지 않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것

정어 正語       바른 말

               거짓말, 쓸모없는 말, 욕 따위를 하지 않는 것

정업 正業       바른 행동

               어떤 생명도 빼앗지 않고, 훔치지 않고, 불륜을 하지 않는 것

정명 正命       바른 생활

               부끄러운 생활을 하지 않는 것

정정진 正精進  바른 노력 

                바른 방향을 향해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

정념 正念        바른 알아차림

                 맑고 주의 깊은 마음을 이어 갖는 것

정정 正定         바른 마음의 통일

                 지혜가 작동될 수 있도록 마음을 평온하고 통일된 상태로 유지하는 것

 

(125) 이것의 목표가 '반야의 지혜를 완성'하는 것, 곧 '반야바라밀다'임을 알아두기 바랍니다. 

 

(126) 8정도 가운데 특히 중요한 것 하나가 '정념'입니다. 정념이란 나날살이 속에서 자신의 생각과 행동 일체를 의식화해가는 훈련을 말합니다. 이 훈련을 통해서 우리는 내 행동의 자동성, 기계화, 곧 조건 지어져서 움직이는 것을 알아챌 수 있습니다. 

 

(128) 자신의 행동이나 감정이 얼마나 자동적으로 일어나는지를 그 자리마다 알아채는 것 말고는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130) 마음을 티 없이 갖는 것이란, 자신의 마음에서 집착이나 분노의 '인'을 없애 가는 것을 말합니다. 인이 없는 곳에는 과도 없습니다......자신을 관찰하는 훈련이 깊어지면 감정의 동요가 몸에 일어나기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에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알아차리면 반응이 마음으로 올라오는 것을 차단할 수 있습니다. 

 

(137)  그런 행동밖에 취할 수 없었다면, 그것은 자유로운 행위가 아닙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행위의 씨앗이 기회를 얻어 꽃 피었을 뿐입니다. 

 

(138) 8정도 가운데 '정념'과 함께 중요한 것이 '정정', 곧 명상입니다......명상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깥 세계에 조건지어져서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우리의 나날의 행동을 그 조건 지어짐으로부터 풀어내는 데 있습니다. 조건 지어짐이란 과거에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해체하는 일은 '지금, 여기', 현재에 사는 훈련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139) 불교에서는 마음의 활동을 네 단계로 나눠서 봅니다. 한자로 '수상행식 受想行識'이라고 하는데, 하나의 단어처럼 묶어서 씁니다. 

수 = 감각작용

상 = 표상(이미지) 작용

행 = 마음과 몸이 조건 지어지는 작용

식 = 인식작용

 

(142) 나날살이에서 떠오르는 잡다한 생각이 곧 '식'입니다. 조건 지어진 머리가 생각하는 잡념이라고 해도 좋은 걱정하기, 기대하기, 바라기, 후회하기, 욕 퍼붓기 등 우리를 괴로움에 빠뜨리고 그것을 돕는 정신 활동입니다. 명상이 필요한 것은 이렇게 조건 지어져 있는 일상적인 사고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입니다. 

 

(143) 아무 생각도 하지 말라는 건 무리이기 때문에 생각을 해도 좋으나, 그렇게 올라오는 생각은 단지 '생각'일 뿐 '사실'이 아님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144) 우리는 나날의 삶 속에서, 예를 들어 10분이나 20분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고요히 자기 정신과 하나가 되어 지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얼마 안 되는 그 시간이 우리 삶의 방식을 바꿔 가는 큰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145) 호흡을 의식하는 것, 들고나는 숨에 의식을 두는 것만으로도 바로 자신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사랑해 줄까>

 

받아들임

 

(148) 붓다는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가능성을 끝없이 펼쳐갈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합니다......먼저 조건 지어진 채로 무의식적으로 했던 행동을 알아채고, 그 틀을 해체해 가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149) 그중 우리의 태도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지금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으면 바깥 세계에 의지하는 일이 사라지며 온갖 조건 지어짐이 절로 해체되기 때문입니다. 

 

(150) '이렇게 됐으면 좋았을 것을'이라는 이상에 따라 스스로를 심판하고, 이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인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151) 자신에 집착하고 있을 뿐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아무리 세월이 가도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152) 사실은 나도 아무래도 좋다고, 하찮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자신에 대한 태도와 남에 대한 태도는 하나입니다. 

 

(153) 우리는 지금 이순간, 무엇 하나 부족하지 않습니다. 행복해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주어져 있습니다. 더 있어야만 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다

 

읽기 

 

(157) 우리는 깨달음에도 집착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무언가로 그런 구별하는 마음의 움직임을 완전히 멈추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반야심경≫은 그 역할을 맡으려고 등장한 것처럼 보이는 경전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반야심경을 읽어보면 됩니다 . (170) 여기서 저는 '가고 가서 저 언덕에 이른 자여. 깨달음이여. 경사로세!'를 조금 가공해 보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벌써 강을 건넜다. 여기가 저 언덕이다. 이보다 기쁜 일이 어디 있으랴!' 이렇게 말이지요. 요컨대 이 주문은 우리에게는 이미 행복해지는 데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여기가 이미 저 언덕이라고 기회 있을 때마다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는 말이라는 겁니다. 

 

(171)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기적을 낳는 열쇠라고 저는 여러 번 말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 데 이 주무난큼 좋은 게 없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문을 외어 자신에 관한 부정적인 믿음을 지워가는 것이 행복해지기 위한 첫걸음입니다.